2009년 10월 23일
직장인이라는 신분으로 긴 항해
요즘 커리어에 대한 생각을 안그래도 많이 하던 가운데, 한국 tv에서 이런 프로그램을 보고 마음이 아주 착잡해 졌다. 취업난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 요즘 젊은이들은 자기소개서도 열심히 박진감 넘치는 버전으로 여러개 써야 하고, 모여서 모의면접도 하고, 그 비싸다는 대학 등록금을 1-2년 더 내면서까지 대학에 머무르고 (취직 될 때 까지).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그들이 느끼고 있을 불안감이 느껴져왔다.
그럼 나때는 어땠던가?
난 서울 유명 대학의 지방 캠퍼스를 나와서 명함 내밀 것 없는 처지였고, (게다가 졸업도 안 했었다.) 유학을 했다고는 하지만 뉴질랜드의 한 시골 대학교. 게다가 졸업하고 한국 돌아왔더니 IMF가 빵 터져서 그나마도 나쁜 조건에 나쁜 힘을 실어 주었다.
컴플렉스를 한가득 안고 이력서를 쓰기 시작했다. 난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었으므로, 대기업에 취직할 수 있을거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그래서 일생 단 한번도 대기업에는 지원해 본 적이 없다. (TV 프로그램에서 본 똑똑한 취업 준비생들은 서울 중상위권 대학 출신이고, 다들 공부를 잘 했을 테니 집안의 기대도 한몸에 받았을터. 처음부터 조그만 회사에서 일하고 싶지 않은건 당연하리라. 그들은 다들 대기업의 모집 일정을 꿰고 있었다.) 한번 지원해 볼까 하는 마음은 있었는데, 그 포멀한 양식의 신청서를 보자마자 밥맛이 뚝 떨어져 버렸다. 이렇게 번듯한 회사가 나를 채용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한국엔 정말로 똑똑하고 또 학벌을 비롯한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 많으니까.
그래서 조그만 회사에 취업했다. 처음 이력서를 보낸 곳에서 연락이 왔고, 더 맘 졸이며 고생할 것이 귀찮아 그냥 나를 받아들여 주기로 한 곳에 취업한 것이다. 회사의 분위기는 가족적이고 더할나위 없이 좋았지만, 그 가족적인 분위기 탓에 여기 오래 있어도 별다른 발전이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비해 업무량은 들쭉날쭉해서, 외국에서 바이어가 방문할 때는 출퇴근 시간이 따로 없을 정도로 힘들게 일했지만 발주한 장비의 선적을 기다리며 하는 사무 업무는 지루할 때가 많았다. 무엇보다 그시절의 나는 내가 그보다 엄청 더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는줄 알았으므로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오래 버티기가 힘들었다.
어느날 갑자기 사표를 내버렸는데, 다음 일을 곧바로 찾을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공백기가 생각보다 길었다. 이때 뼈저리게 배운 교훈은 다음 갈 자리를 정해놓고 사표를 던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무 생각 없이 회사를 그만둔 것은 내 커리어 인생 10년동안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집에 있으니까 들어오는건 없는데 모아둔 돈이 얼마나 빨리 없어지는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하여 쇼핑도 자주 했고, 매일 나가서 돌아다녔으니 당연했다.
서술하기 시작하면 지루하기만 한 일들을 다 줄이겠다.
그 후에도 나는 다른 회사를 몇번 더 다녔고, 마치 커리어를 리셋하듯이 회사의 분위기가 파악된 후 아니다 싶으면 주저없이 그만두었다. 다 해외영업직이나 물류, 수출입, 본사 커뮤니케이션 쪽이었고 계속 한국의 중소 기업이었다. 말했다시피 대기업에는 한번도 지원한 적 없다.
그러다가 반도체 장비를 제조한다는 한 자본금 빵빵한 미국 회사에 입사했고, 이때부터 내 운이 조금씩 트이기 시작한 듯 하다.
여기서도 삽질은 끊이지 않았는데, 한 예로 계약직이 뭔지도 말 모르면서 계약직으로 들어간 것이다. 다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나를 비롯한 계약직 직원들은 보너스를 받지 못했다. 이 회사는 실적으로 먹고 사는 회사이므로 연말에 그해의 성적이 얼마나 좋았느냐에 따라 인센티브가 많게는 1000%까지도 되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정직원과 나의 연봉 차이는 항상 연말에 두배 이상 벌어졌다. 계약직으로 고용계약에 동의하고 싸인한건 나면서 무식한게 용감하다고 HR에 따지러 갔었다. 인사과 매니저는 진땀을 흘리며 나를 설득시켰다. 회사의 organization 변화에 따라 열심히 일하면 정직원이 될 수 있는 기회도 있을거라고. (젊어서 피가 끓던 나는 물론 인정받을 때 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이 회사의 네임 밸류는 정말 대단한 것이어서, 다음에 이직하려고 했을 때 지원한 모든 회사에서 주목을 받았다. "xxx사도 아주 좋은 회사인데 왜 옮기려고 하죠?" -> 가장 많은 받은 질문이었다. 물론, 내가 계약직으로 일했다는 사실을 광고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정직원이었다고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고. 결국은 처음 계약직으로 일했던 회사의 유명세 덕분에 나는 계속해서 뜨르르한 미국계 다국적 기업으로 옮겨가며 일했고, 승진도 했으며 연봉도 올렸다. 지금은 스웨덴에서 스웨덴 회사에서 일하고 있으며, 글로벌 기업의 헤드쿼터에서 근무하는 셈이니 말하자면 대기업 맞겠다. 드디어 내가 대기업에서 일하는 셈이구나. (물론 내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건 아니다. 그냥 한 분야의 일을 맏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매니저도 아니고.. -.-)
"처음부터 시작을 잘 해야 하잖아요." - 취업 준비생에게 왜 대기업을 고집하냐고 물었을 때 나온 답변이었다.
그건 완전 맞는 말 맞다. 헌데 요즘의 사원 모집 요강을 보면, 경력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경력은 인턴쉽으로만은 생기지 않고, 어디선가 일을 해서 세월을 보내야 쌓아진다. 아무리 자기소개서를 멋지게 써도, 회사 입장에서 이야기 하자면 실무 경험이 없는 학부 졸업생에게 거는 기대는 크지 않다. 사실은 고만고만한 신입들 사이에서 피터지게 경쟁하는것 보다, 이직률이 잦은 경력직에 지원해서 원하는 것을 얻을 확률이 훨씬 크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처음부터 대기업만 지원하여 패배를 맛보고 좌절하는것 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분야의, 작은 회사라도 좋으니 실무 경력을 쌓는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처음 대기업으로 스타트를 끊어야 계속 그쪽으로 자리를 잡는다고 하는데, 그건 내가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
실컷 훈계 비슷한 잘난척을 위에 해놓고 할말인가는 모르겠지만 요즘 나는 커리어를 바꾸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배운 도둑질이 이거라고 풀리는 대로 계속 쉽게 예전에 하던 일을 계속 했기 때문에, 나는 적성에 안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이쪽 계통에서 일했는데 슬슬 한계가 온다. 내 적성은 좀더 크리에이티브 한 일이지만 아이러닉하게도 가장 잘 못하는 통계와 수학이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 배운 장단으로 그럭저럭 춤은 추고 있어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렇게 오래는 못 버티겠다는 외침 뿐이다. 다행히 우리 회사는 부서와 지사간의 이동이 자유롭지만, 희한하게도 우리 회사 제품은 선진국보다 후진국이나 제 3국에서 아주 잘 팔리므로 지사가 있는 나라는 전부다 가고 싶지 않은 나라 뿐이다. ㅠㅠ 작년에 뉴델리에 비즈니스 셋업 매니저로 오픈 포지션이 있었지만, 몇년전 뉴델리에 한번 출장갔다 온 후로는 인도에서 살고픈 마음이 1프로도 없어졌다. 제3국의 지사 매니저로 가서 한 5년 오만고생 다하고 본사로 돌아와서 한자리 꿰차는게 출세의 정석이건만.
그래서 지사 이동은 포기하고, 부서를 옮기고 싶어 여기저기 껄떡대 보지만, 나도 이제 20대가 아니다 보니 -.- 슬슬 2세를 계획해야 하고, 그러자면 1년에서 1년 반쯤 육아 휴직을 할텐데 지금 부서 이동해서 또 maternity leave 갔다 오고 어쩌고... 후. -.- 여자들은 정말 커리어 계획하기 힘들다. 잡생각만 많아지는 나날들이다.
그래도 코스메틱 인더스트리의 일은 정말 재미있다. 반도체 회사나 컴퓨터, 서버 회사에서 일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그래서 결국에는 메이저 코스메틱 회사에서 일하는게 목표인데, 스웨덴이 주로 북유럽 헤드쿼터임에도 불구하고 워낙에 적은 인구로 인해 포지션 오프닝이 자주 없다. 그래도 이래저래 시간은 잘도 흘러가겠지. 마음 한구석에 원하는 것을 항상 기억하고 살다보면 기회는 언젠가 오리라. 그때까지 열심히 살자.
# by | 2009/10/23 21:43 | 스웨덴 생활 | 트랙백 | 덧글(36)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가끔씩 여기서 누님 기운좀 얻어가도 되겠죠^^?
들어온김에 예전글들 쭈욱 읽어봤는데.. 넘 좋아서요 ^^;
항상 건승하세요~
요즘은 새 글이랑 그림을 전혀 안 그려서 부끄러운 블록이지만 자주 놀러 오세요~
정말 한국에 잘난 사람들 많죠!!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진심으로...) 안타까워요. 그 많은 인재들이 취직에 온 에너지를 소비해야 한다는 사실이...
사실 취업 준비하시는 분들께 (건방지게) 보탬이 되라고 쓴 글은 아니었는데... 걍 제 경험 이야기예요.. ! ^^ 자주 놀러오세요 미도리님~